세번째 - 구십 년간의 외출

구십 년간의 외출

 

                                    - 김 소 해 -

 

설화 꽃잎 온 천지를 뒤덮는 계절

 

눈처럼 깨끗한 마음

 

뛰는 심장에 담아

 

넘치는 사랑

 

심고 또 심어

 

화려한 꽃밭 가꾸려 나선 길

 

엉겅퀴와 가시덤불

 

그림자처럼 따라다녀도

 

내 아이들 다칠세라

 

손가락 찢기어 피 흘리는 아픔조차 즐거우셨고

 

허리 휘는 배고픔 참아

 

한입 더 자식 입에 넣으시며 행복해하셨을

 

어머니

 

 

 

7남매 걱정으로 어둠을 재우시고

 

안쓰러움으로 한낮의 뜨거운 태양 등에 지고

 

머리카락 부채 삼아

 

서늘바람 불어

 

편안한 잠 누이셨던

 

어머니

 

구십 년을 하루 같이 다하신 그 마음

 

가슴에 받들지 못하고

 

싸늘한 땅속입니다

 

 

 

꽃상여에 자는 듯이 보내달라 하셨던

 

어머니

 

그 작은 소망 하나 들어드리지 못해

 

용암 되어 흐르던 통한의 눈물은

 

청개구리 되어 당신의 강이 된

 

아들의 눈물을 보셨습니까

 

 

 

어머니

 

당신께서 계셨으면

 

가슴으로

 

가슴으로

 

그 피눈물을 받으셨겠지만

 

두 손으로 받아 당신의 바다에 부었습니다.

 

 

 

어머니

 

당신께선 형식이나 체면보다

 

사랑을 사랑하셨지만

 

세상엔 체면이나 형식을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

 

임의 가슴에 한 서리 깔아드림이 서러워

 

무향의 초설 불러

 

설화 꽃잎

 

몸에 얹으셨습니까

 

 

 

어머님

 

어머님의 자식이던 마음으로

 

또한 동생의 도리를 다하려

 

임의 소망 들어드리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

 

동생 된 아들을 용서하시여

 

 

 

꽁꽁 묶인 몸 답답다 마시고

 

편안히 쉬시고

 

높이높이 오르소서

 

벼 이삭이 누렇게 익은

 

가을 벌판의 풍요를 보시며

 

마냥 즐거워하셨던

 

어머니

 

 

 

두 손 꼭 잡고 거닐던

 

그 마지막 행보의 들녘엔

 

봄을 위한 겨울잠이 찾아드는데

 

어머님

 

당신께선 무한공간의 암흑성운 뒤에

 

몸을 누이시고

 

어느 빛 속을 걸으시옵니까

 

 

 

임이시여

 

당신의 구십 년간의 외출은

 

눈이 부시도록 화려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자식의 마음에

 

출렁여 넘치는

 

임의 바다를 이루었기에

 

 

 

어머님을 보내드리고...

 

(산을 내려오면서)

 

19991129

 




- 아들의 변 - 


1999년 할머니의 부고를 들은 것은 교회에서 친구와 함께 


청년 예배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고등학고 1학년을 어찌 어찌 보내고 아무것도 모르게 천진난만하게 놀 때 였다. 


현실 감각도 없었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지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슬픈지 어떤지도 모를 그런 시기였지만 (철이 좀 늦게들었다)


막연히 할머니의 부재에 가슴 한켠이 아려왔었다.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너무 오래 된 일이긴 하지만


몇가지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이천의 큰 어머니 댁으로 가 할머니의 시신을 확인했다. 


병풍뒤에 누워 염을 마친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뭔가 알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참 예뻐 하셨고 돌아가시기 1년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랑 같이 살았었다. 


17년 가까이 할머니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가까운 가족이었다. 


집이 너무 춥고 노쇠한 할머니를 모실 수 없어 어머니는 할머니를 큰어머니 댁으로


보내드렸다. 


1999년 설 명절때 큰어머니 댁에서 계시는 할머니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그런가.. 돌아가신거구나..' 라는 생각만 머리를 맴돌았다. 




할머니는 9남매를 키우셨다. 어릴적 둘을 잃으시고 7남매가 되었다. 


그중 우리 아버지는 막내였다. 


어려운 시절이라 아이들 키우는게 녹록치 않았겠지만 9명의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힘들었을 것이다. 입을 것 못입고 먹을 것 못먹어 가며 아이들을 키우셨을텐데 


그 살아온 이야기를 나는 너무 어려 듣지 못했다.


이 시를 통해 어렴풋이 그랬을 것이다 생각해 보는 것이다. 




가난 하게 살아오신 탓에 재산이나 이런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할머니의 유언은 화장하지 말아줄 것과 전통방식의 염을 하지 말것을 부탁 하셨다. 


우리 전통방식의 염은 온 몸을 꽁꽁 묶어 장사지내는 것인데 땅속에 들어가서도


답답하기 싫으셔서 그런 부탁을 하신 것 같다. 


사람들은 죽고 나서야 그런것이 뭐가 문제냐 하겠지만 할머니는 그것을 원하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형님들께서는 전통 방식을 따르길 원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말자 하셨으나 의견은 묵살 된 것으로 보인다. 


내가 할머니를 봤을때는 이미 온 몸이 묶여 염이 되어 있었고 그렇게 땅속에 묻히게 되셨다. 


장례지내는 3일동안 흐트러짐 없이 내내 조용하셨던 아버지는 입관하던 순간에


미친듯이 통곡 하셨다. 어머니를 외치며 그저 우셨다. 


아마도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한 


못난 아들임을 자책하신 것으로 보인다.




얼마전 평택집을 찾았을 때 어머니가 불현듯 할머니 이야기를 하셨다. 


할머니가 몸이 안좋아 지시기 바로 직전에 어머니와 함께 산책을 하셨다고 한다. 


1997년 가을 경으로 기억하셨는데 할머니가 문득 가을 벌판을 보시며 벼가 참 잘익었다


하셨다 한다. 그러면서 어머니께 


'나같은 늙은이랑 시간보내는게 네가 뭐가 좋겠니...' 


라며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한다. 


어머니가 시를 쓰시던 시기는 2년이 지난 겨울. 


할머니와 같이 거닐던 그 시절을 생각하시며 시를 쓰신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시집살이가 심했었다. 


대부분의 우리네 어머니들이 겪은 이야기지만


유독 우리 어머니 만큼 심하게 시집살이를 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들이라 어머니편만 든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살아오면서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만 해도 만만치 않은 사건들이 많았다. 


이젠 원망해도 들을 사람도 없는 마당에 어머니는 시어머니를 기리는 시를 헌정했다. 


미운정 고운정 다 들어 버린 것인지 어머니는 당신의 시어머니가


가시는 마지막 길이 많이 아쉬우셨나보다. 



*원문에 표기되었던 '님'이라는 표현은 의미상 '임'으로 수정하여 표기하였습니다.